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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소통’이란 맞춤형 줄기 세포

'소통'이란 맞춤형 줄기 세포 <킹콩 King Kong>

1. 애니 감독 L의 눈물
"나는 어디로 온 걸까? 킹콩 보고 찔찔 짜다" 눈이 퍼붓는 날, 문자 메시지를 받다. 일러스트하는 후배가 <킹콩>을 보고 울었단다. 어, 그거 B급 정선데? 한 손에 금발 미녀를 쥐고 엠파이어 스테이트를 오르는 괴물 이야기가 무에 그리 감동일 것인가. 전직 애니 감독, 그의 눈은 틀림없었다. <공각기동대>의 시적 우울이나 <모노노케 히메>가 들려주는 신화의 세계를 누구보다 먼저 구해 준 그가 아니던가. 알 수 있었다. 사고의 새로운 방법에 대한 아픈 울림이, 내려놓고 있던 꿈들의 찔러댐이 삽화로 먹고 살아야하는 그의 머리를 쳤을 것이다. 안다. 그도 나처럼 소심하고 지나친 긴장의 상태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이제 그도 자기 소득을 자기 맘대로 쓸 수 없는 나이라는 것도. 그래, 나약과 권태 속에 늙어가는 청년의 힘줄을 깨우쳤기에, 아니, “어렸을 때 본 킹콩을 보고서 영화감독이 되었다”는 피터잭슨의 감동 멘트 때문에 울었을 것이다.

2. 감독 K가 만드는 유쾌한 배반
빡센 세상, 힘든 시절일수록 표현의 풍부한 소재를 갖는다. 하여, 우리네 감독들이 주로 80년대를 그린다면 저쪽 동네는 30년대를 자주 그린다. 자본주의의 실패가 눈에 보여 영화 속처럼 쓰레기통을 뒤지는 시대였기에 할 말이 많았으리라. 여기 자동차는 넘쳐나지만 배고픈 뉴욕, 정말 영화를 찍고 싶어 안달이 난 감독이 있다. 그는 재능과 동기가 넘쳐나는 사람이지만 딱 한 가지, 돈이 없다. 영화를 향한 열정이 끓어 넘치는 칼 덴헴(잭 블랙)은 신중함 대신 용감함이 무기인 감독. 가난한 희극 배우 앤(나오미 와츠)을 발굴한 무대책의 그는 미지의 해골섬을 찾아 촬영을 밀어부친다.
영화 초반부, 그의 뛰어난 순발력과 정력이 샘솟는 시간들은 흥미로 넘쳐난다. 잠시도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않고 미지의 생물들이 주는 절대절명의 순간들을 기록하는 감독. 공포를 용기로 바꾸는 능력을 가진 이 뚝심쟁이는 영화라는 종교에 순교하는 예술가로 그려진다. 멋진 스크린을 위해 원주민의 화살이나 티라노사우르스가 저지르는 발광의 위기에도 렌즈를 놓치지 않는 감독의 자세는 관객을 감동의 세계로 이끈다. 그러나 미녀를 데려간 고릴라와 맞서면서부터 그는 예술가라기보다는 흥행가라는 DNA를 드러낸다.
고릴라, 콩! 피터 잭슨이 배양한 이 몬스터는 자잘한 기술을 쓰지 않는다. 작전구상이 전혀 없는 이 고릴라는 열 받으면 육식공룡의 입을 찢지만 저글링하는 미녀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 납작코를 벌름거릴 뿐. 세상에, 18미터짜리 홀아비 고릴라가 미녀와 함께 노을을 감상하다니. 그러나 야수에게 제일 큰 데미지는 감정의 혼란. 혼란은 감독도 마찬가지. 애써 담은 필름이 티라노사우르스 때문에 오염되는 순간, 예술가의 줄기세포는 갑자기 흥행가의 곰팡이가 끼어들기 시작하고, 이 괴물 고릴라를 포름알데히드로 잠재워 거대한 장난감을 만들기 위한 조작이 시작된다. 그의 용기는 사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혈기에서 나온 것이기에 현실을 인정하고 현찰을 택하는 것. 짜식, 아랫몸이 물고기인 인어를 발견한다면 그는 윗몸은 키스를 하고 아랫몸은 후라이팬에 구워먹을 인간. ‘그래 이게 감독의 자세야’ 하는 기대를 가졌던 관객들에게는 그 배반 또한 유쾌하다. 영화니까.

3. 감독 W박사가 만든…
언론 속의 감독 W는 항상 명쾌했다. 교양과 도덕적 감화력까지 다 갖춘 모험가이자 과학자. 살 안찐 남궁원 마스크에다 세련된 매너까지. 거기다 사회적 협력을 이끌어내는 놀라운 재주. 그런 그의 연구는 연금술이 아닌 과학이었고 장애를 입은 사람들에게 그의 어려운 용어는 복된 말씀으로 들렸을 것이다. 영롱이와 스너피를 보여주는 그를 보며 백성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전리품이 없을지라도 동포적 유대감에 새록새록 젖었을 터. 이 발견이 산업적 성공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출은 SF영화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가 발견한 엘도라도가 우리 땅이 될 거라는 무한한 신뢰는 새로운 형태의 애국심으로 변해갔다. 그의 발견은 개인의 위대함을 넘어 조국의 영광으로 이어졌고 태클을 거는 자에겐 이단의 형벌이 퍼부어지면서부터 뭔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추호의 의심이나 질투 혹은 풍자를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는 종이 신문들이 매국노를 복제하기 시작하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는 명망가의 아들이 아니었기에 존경받을 만 했다. 보편 법칙을 초월하는 그의 발견에 지지를 보내지 않은 자 누가 있었을까. 그런데 그의 세련됨이 테크닉이었다니, 창조적 열정이 권력으로 점철되는 속물근성이었다니. 과학의 진보에 대한 모두의 동의가 허무개그였다니. 안됐다. 그러나 우리는 참담했다. 사적인 잘못으로 치부하기에 발견에 동의했던 날들이 부끄러워진다. 세상에, 높은 엄격성과 도덕률은 접어주고라고 자기통제력 만큼은 있었어야 하는데 말이다. 마음의 동상을 모두 허무는 이 시점에서 W감독에게 한 번 묻고 싶어진다. <가타카>, <아일랜드>, <에이리언> 이런 영화들을 본 적은 있는가? 들어는 보았냐고.

4. 감독 P가 만든 매혹
<반지의 제왕>세 편으로 미국에서만 10억 달러라는 박스오피스 기록을 세운 피터잭슨. 아홉 살 때, TV에서 <킹콩>을 본 뉴질랜드 촌놈은 이 흑백 영화가 내 인생의 등대였다고 말한다. 이 판타지 시리즈의 성공이 어찌 재물과 명성으로만 치부할 일이겠는가. 수백만 명 지지자에게는 미지의 세상을 보여주는 재미와 신선함의 기대 만족이 성공을 가져온 것이리라. 또 순종에 길들여 있지만 독창성을 꿈꾸며 살았던 평론가를 비롯한 선수들에게는 끝없는 새로움의 추구에 동의를 얻었을 터.
제인 구달이라는 학자를 기억한다. 선한 동기를 지닌 그녀의 연구가 보여준 다큐 속의 침팬치들에게 기특함은 있었지만 매혹을 느끼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콧대가 전혀 없는 합죽한 괴물 킹콩은 서편 노을에 일관성을 갖는 순한 짐승이었다. 이 순한 짐승을 화면 속에서 함께 응시하는 아들 곁에서 나는 큰 발견이나 한 것처럼 제법 고양되었다. 아이의 내면에 깃든 모험의식을 깨우기 보다는 선생이나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던 나는 영화 보는 내내 감탄사와 형용사 부사를 섞어가며 간간히 아들과 속삭였다. 싱싱한 물고기 같이 퍼득거리는 훌륭한 동기를 발견했다면 오버일 것이지만, 하여튼 굉장히 재미있었다. 눈 속을 뚫고 돌아오는 차 안, 아들은 자신의 청음력을 자랑하면서 재즈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겨울 방학 친구들과의 서안 낙양 여행에, 우리 같이 가자로 화답해 주었다.
우리는 언제 이렇게 커버렸을까? 그런데 왜 이렇게 작아졌을까? 어릴 때, 책임보다는 동기부여를 먼저 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 어디 교육학에서만 나오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하여, 먼저 본 입장에서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감히 훈수 한 마디. 미운 짓 하는 자식들 데리고 극장에 가시라고. 이런 저런 카드로 할인을 받으며 극장에 들어서 킹콩과 금발의 '친절한 나오미씨'가 함께 바라본 노을의 세계에 젖다 보면, '소통'이란 맞춤형 줄기세포도 자라날 것이라고. 꼭 볼 영화! DVD 서플이 기대된다. - butgood@한메일.넷


영화 '킹콩'을 보고 감동에 못이겨 영화매니아이자, 평론가이자 영화제 사회자이자, 교사이자 작가이신 신선생님께 문자를 날렸다. 지난주말 내려가 뵙기전 메일로 '킹콩' 관람기를 보내오셨다. 어느 신문이나 온라인매체에 기고하시는 원고로 추측된다. 내용의 첫부분이 내가슴팍을 찌른다.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