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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죽음의 문턱에 다녀와

을 떳을때는 병원 응급실이엇고, 막 잠에서 깬 나를 보고 의사가 달려와 작은 손전등 같은 것을 눈에 비추며, 눈꺼풀을 뒤집어 보았다. 잠시후, 누워있던 침대에 실려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죽음의 문턱이 그렇게 가까운 것을 안것이 15살 사춘기때다. 눈뜨기전 어둠속에서 하얀 그림자 환영들과 공중에 떠서 뼈없는 연체동물이나 벌레들 혹은 꼬리달린 정자들처럼 꿈틀거리며 떠다니고 있었고,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갑자기 아래로 떨어졌다.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듯 놀라 번쩍 눈을 뜬곳이 바로 응급실이다. 한달여간의 낯선 병원생활은 방학같은 것이였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창피함에 학교가기를 피했다. 어느날 찾아온 담임선생님은 얼른 돌아오라는 충고를 남기고 떠났다. 처음 담임을 맡은 그에게 내 사건은 꽤나 충격이엇을지 모른다.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너무 단순했다. 당시엔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기가 벅차면 대부분 자살을 선택했던 시절이다. 병원에서 들은 얘기로 같은날 응급실 옆자리에 연탄가스를 마시고 자살한 여고생들 몇명이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엇다고 한다. 단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세상은 가진 것 없는 소년이 꿀 꿈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비관적일 뿐이였다. 유서를 쓴뒤 약을 삼켰다. 그리고, 기억을 잃었다. 그것은 세상에 태어나 넘긴 죽을 고비중 첫번째였을 뿐이라는 것을 한참뒤에 알았다. 마치 죽음의 그림자 같은 것이 등에 업혀 있는 것처럼 삶이 무거웠다. 일찍 무게를 느끼고나니 이따위 세상은 있으나 마나한 곳이였고, 죽는 것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닳았다. 왜 생명의 선이 끊어지지 않았을까? 무슨이유로 남았을까? 알수는 없지만, 끝나지 않는 삶에 어떤 이유가 있을거라는 판단으로 그것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 탐구를 위해 좀 더 살아 보기로 했다. 그뒤부터는 세상살이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수차례의 가출이나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는 구타의 경험은 스스로를 더 독하게 만들어 준 셈이다. 죽음에 대한 경험도 알고보면 그다지 별거 아니다. 운이 좀 나쁘면 그냥 죽는거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운이 좋다면 살아남거나 신체한곳 부서지는 쯤이겠지. 세상을 좀 더 단순하게 쳐다보면 그렇게 단조롭고 간단명료할 뿐이다.

아직 열살이 되기도 전 학교등교길에 발견한 자살한 아저씨의 눈동자가 아직 눈에 선하다. 사과에 약을 묻혀 먹엇는지, 그의 손에는 먹다남은 사과가 들려 있었고, 입에는 거품이 하얗게 묻어 있었고, 눈은 머리위쪽을 쳐다보고 입을 벌린채 큰대자로 누워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수사반장 흉내를 내며 손으로 눈위에서 손짓해 보았다.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죽은게 분명했다. 지나던 아저씨에게 대신 신고를 부탁하고 학교로 향했다. 얼마후에는 한겨울에 얼어죽은 거지를 먼발치서 쳐다보기도 했다. 추운곳에서 덜덜 떨다 숨진 모양이다.

병원서 나온 얼마후 다시 학교를 갔고, 한동안은 수근대며 바라보는 아이들의 이야기꺼리가 되야 했다. 아이들은 말붙이기조차 두려워했다. 그저 호기심 어린 모습들로 죽음을 경험한 아이를 바라볼 뿐이다. 몇년후, 다른반 아이가 같은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한참이 지난뒤에 다시 녀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같은 시기에 밤길을 걸어 친구네 동네에 갔다가 밤12시가 다 된 시간. 논두렁옆 다리밑에 박혀있다 하루만에 발견된 돼지처럼 퉁퉁 부풀어 오른 어른 시체가 꺼내 올려졌다. 내장은 찢겨졌고, 관절부위들이 부러졌다는 부검결과를 옆에서 들을수 있었다. 전날밤 뺑소니 차에 치어 그리된 모양인데. 피의자는 이 사람을 작은 다리밑으로 밀어넣고 보이지 않도록 수풀로 가린채 밖으로 못나오게 빈틈을 돌로 매꾸고 도망친 모양이다. 하루가 지난후에 발견된 시체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었고, 양손에 움켜진 수풀들이 그가 사고직후에도 살아 있었슴을 증명해 주었다.

인적이 드믈고 도로가 넓어 자동차들의 과속이 잦은 동네앞 도로는 일년에 몇명씩 사고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동네사람 타지사람 할 것 없이, 그 도로에는 마치 귀신이 씌인 것처럼 해마다 사람들이 교통사고로 죽임을 당했다. 그 도로에서의 첫 사고는 아직 결혼하지 못한 덜떨어진 동네 총각이엇다고 전해진다. 그 총각의 혼이 도로에 사고를 일으킨다는 무당의 말에 굿도 벌이고 허수아비 인형들을 만들어서 사후결혼도 시켜보았지만 허사였다. 기억에 남는 사고로는 신혼여행을 가던 신혼부부의 사고와 첫출근 나온 경찰관의 사고정도다. 어느날 밤엔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가 급히 지나던 트럭에 치이는 사고를 목격했다. 아버지인듯한 운전자와 딸인 듯한 여자가 내려 어쩔줄 몰라했고, 가까이 다가가 뒤에 오던 봉고차 운전자와 합세하여 쓰러진 사람을 차에 싣는데 중간을 든 나는 그 무게에 쩔쩔매야 했다. 차는 급히 자리를 벗어났고, 아마 병원으로 갔을거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던중 어디선가 비린내가 났다. 껌껌한 밤중이라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 비린내는 내몸에서 나는거었고, 불빛에 몸을 비춰보니 온몸이 피로 흥건해 있었다. 아마 사고난 사람을 옮길때 피가 묻은 모양이다. 피냄새가 그렇게 비리고 역겹다는 것을 안것도 고등학생때였다. 비릿한 피내음은 빨아도 빨아도 지워질줄 몰랐고, 결국 그 옷은 버렸다.

세상에는 많은 사건 사고들 처럼 시체도 종종 볼수 있다. 경복궁앞에서 사고로 피를 흘리고 죽어 쓰러져 있던 노파나 어느 소방서앞에서 대형화물차에 치어 뻥소리와 함께 골이 순두부처럼 터져버린 시신등 심심치 않게 주검들을 마주하게 된다. 고등학교때 미술대회를 나갔다가 홍대안에서 발견한 머리가 날아가 조각난 시신의 사진들과 정부 어느 기관에서 고문당하다 죽자 토막내어 불에 태워지다 한강에 버려진 미공개 사진등을 접하며, 이게 인간의 삶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때는 고1이였고, 왠지 모를 분노가 몸서리치던 때였다. 그후로 3년간 내 머리속은 미쳐버린듯 했다. 인생에 대한 의문으로 책에 파묻히고 혼자 자전거 타기를 하며 학교 아이들과는 멀리하며 지냈다. 수업시간에 빠져나와 대포집에서 500원짜리 막걸리에 김치 한입 먹거나, 선생님들이나 10년차이도 더나는 형님에게 술 얻어 마시며 듣는 세상이야기들이 잠시나마 해갈의 시간이엇을뿐, 간접적으로 얻을수 있는 열쇠라고는 책밖에 없었다. 만화책이든 소설책이든 철학이건 인생론이건, 죙일 책을 보거나 일요일 하루를 영화만 보았다. 어느날, 학교를 졸업한 어느 선배가 '끝까지 투쟁하라'며 다니던 대학서 분신자살을 했고, 운구는 학교를 들러 망월동에 묻히게 되엇다. 후배들은 선배의 마지막길을 시가행진을 하며 고이 보내드렸다. 그즈음, 데모를 하다 끌려간뒤 풀려나 학교를 찾아오던 몇몇의 선배들은 심한 고문의 후유증들을 앓고 있었다. 그러다 끝내는 전교조문제로 블랙리스트에 올라버렸다. 아무것도 한것이 없었지만, 누군가 나를 의심한 이(학교신문을 너무 반사회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던)들이 그렇게 매도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해, 학교는 엉망이엇다. 학교로 밀고 들어온 전경들과의 싸움에 밀려 다치는 학생들을 바라봐야 했고, 돌에 얻어 맞는 선생님도 봐야 했고, 학교에서 쫓겨나 해직교사가 된 어느 선생님의 모습도 바라봐야 했고, 그들의 사무실서 거침없이 행해지던 양아치 새끼들의 뻘짓도 봐야했다. 얼마후, 알수 없는 이유로 세상을 떠난 선한 지도자였던 교감선생님을 슬픈비가 뿌리던 날에 다음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기억들. 난 어느 자리에 서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몇몇의 아이들은 머리를 밀고 단식투쟁을 하고 몇몇의 아이들은 어느 정당앞에 찾아가 집회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고교시절이 끝났다. 감당하기 힘들엇던 기억에 다시는 반대편에 설 생각따위를 하지 않았다. 더이상 세상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훗날 운전면허를 딴뒤 자동차를 운전하다 생길뻔한 사고들도 만약 큰 사고였다면 아마도 저세상 사람이 되엇을지 모른다. 다시 시간이 흘러 90년대 후반 어느날은 선배와 함께 택시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했고, 두 차는 모두 폐차지경에 이르럿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사고후유증인지 몰라도 가끔 겪는 신체적 이상증세외에는 아직까지 별다른 문제점은 없어 보인다. 사고를 당하기전 왠지 모를 불안과 예감같은게 있었는데, 아마도 그 사고를 예견한 것인지 모르겠다. 동승했던 선배는 얼마후, 다른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그외에도 대형 사건, 사고현장 근처에 있거나 다른 시간대에 사고장소에 있었지만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그렇게 죽음의 그림자는 늘 등뒤에 매달려 다닌다. 사연이 있는 죽음이건 갑작스런 죽음이건, 언제 갑자기 저녀석이 등에서 내려올지 모른다.

결혼식장보다 많이 찾는 곳이 장례식장 아닌가 싶다. 축복 받아야 할 사람도 많지만, 떠나 보내야 할 사람도 적잖다. 노인들, 친척들, 선배들 또는 그외의 사람들. 투병끝에 돌아가신 작은아버님을, 벽제 화장터에서 부서지는 하얀 뼈조각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무언가 북받쳐 올랐다. 마치 내 뼈가 부스러 지는것 처럼. 그렇게 작은 항아리에 담겨서 떠나셨지만,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 사람은 오는 이를 마중하고 떠나는 이를 배웅하며 자신도 언젠가 다가올 끝자락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모양이다. 그 시간이 당장 내일이나 모레쯤 일지라도 모른척 다른 생각과 다른 행동으로 지내지만, 마음 한켠에선 그것을 맞이할 두려움이 가득하다. 세상이 변하고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종족번식의 의식. 아주 오래전 태평양위로 죽을 힘을 다해 오세아니아까지 날아가 마지막 몸부림 치며 번식을 위해 교미하던 익룡들의 모습처럼, 인간들의 삶 또한 다르지 않다. 그것을 지적인 존재라는 핑계로 치장하고 있을뿐. 그것이 생명체의 본분인지 모르지만, 책임과 의무가 다하고 나면 떠나는 것이 죽음의 길이다. 누구에게나 업혀 있는 죽음의 그림자가 언제가 몸을 붙잡고 어둠속 벌레들이 유영하는 그 세계로 붙들려 가기전까지 아직 살아있으면 그걸로 된거다. 시간은 아직 많으니까.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의 이유를 찾지 못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