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ary

가을 풍경에 빠지다

울로 향하는 늦가을, 기차에 몸을 싣는다. 흐린 가을 하늘 아래로 내달리는 기차 밖 풍경은 울긋불긋, 노랗고 벌겋게 번져 있는 수채화 수십 장이 넘겨지듯 아름답다. 초록이 우거진 여름에는 몰랐을, 초록이 옷을 벗고 나서야 비로소 여름내 숨죽이며 지냈을 풍경이 태어난다. 대지가 헐벗으니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셈이다. 그래, 가을이어야만 접할 수 있는 금빛 물결. 예쁜 나무와 포근하고 편안해 보이는 호수, 저수지가 나에게 손짓하는 듯하다. 갑자기 나타나는 아파트 공사장과 새로 내는 길은 참 볼품없어 보인다.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세월과 주름을 지워버린 그것들은 기품도 없고, 역사도 없고, 천박해 보이기까지 한다. 때묻지 않은 시멘트벽은 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고, 막 새로 찍어낸 뻣뻣한 지폐처럼 어쩐지 가벼이 보인다. 기차는 점점 더 깊은 가을 속으로 달려가고 어느새 구름 뒤에 숨었던 햇살이 창밖으로 스며온다. 역시 기차는 계절마다 타봐야 한다. 봄, 여름, 갈, 겨울 계절마다 새로운 풍경을 제공하는 기차는 계절로 인도하는 안내자이자 자연의 연금술을 부르는 마법사다. 어둡고 답답한 터널은 다음 풍경에 대한 기대로 흥분하게 만든다. 수염과 주름의 골이 깊어갈수록 이 땅의 아름다운 풍경은 그 깊이를 더해준다. 창문을 열고 바깥 냄새를 맡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어쩌면 감성은 주름과 수염, 세월의 흐름이 더할수록 깊어지고 보태지는 모양이다. 멋진 풍경이 손살같이 지나가는 게 속상하지만, '저곳은 어디지?', '내려서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남겨준다. 기차가 점점 목적지에 다와 갈수록 심장도 더 큰 흥분으로 뛰고 있다. 깊어진 가을의 정취가 그 목적지인 듯, 자유가 나를 반긴다. (경주 가는 기차 안에서)